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밀레트 제도 (문단 편집) == 기원 == [[정통 칼리프 시대]]의 제2대 칼리프 [[우마르]]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사산 제국]]의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의 종교 정책에서 기원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인 제국의 황제였음에도 [[기독교]]에도 관대하여 기독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후 사산 제국을 멸망시켰지만 그 제도와 정책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이슬람 제국]]이 종교별로 공동체를 조직하는 제도를 유지했다는 것. 즉, [[데브시르메]]와 [[맘루크]]의 관계 처럼 이것도 오스만 제국이 없는 제도를 만들어낸게 아니라 기존 이슬람 교리에 있던걸 재포장한 것이다]. [[쿠란]]에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에 대해, [[무슬림]]이 소수인 사회에서 무슬림을 박해하지 않는 경우 평화와 공존, 무슬림이 소수인 사회에서 무슬림을 물리적으로 박해할 경우에 한해 [[지하드]](성전)를 벌일 수 있고[* 물론 명분은 이렇기는 했지만, 실상은 이슬람 국가 자신들이 무슬림들끼리 싸울때도 지하드라는 것을 명분삼아 잘만 싸워댔기는 했었다.], 지하드 시 3가지 조건을 비무슬림에게 제시하는데 첫째 무슬림으로 [[개종]], 둘째 [[지즈야]]를 납부하고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받던가 이 둘다 싫으면 전쟁을 통해 모든 사람[* [[노예]]를 말한다. 단 이슬람 교리상 노예는 이슬람을 받아들이는 즉시 [[해방]]되어야 하며, 노예와의 [[성관계]] 또한 해방시켜 [[결혼]]하지 않는 이상은 금지다.]과, [[재산]]이 무슬림으로 귀속된다고 [[코란]]에 명시되어 있다.[* 너희에게 도전하는 하나님의 적들에게 도전하되 그러나 공격하지 마라 하나님은 공격하는 자를 사랑하지 않으시니라.(바카라장 190절), 비록 싫어하는 것이지만 너회에게 성전이 허락되었노라. 그러나 너회가 싫어해서 복이 되는 것이 있고 너회가 좋아해서 너희에게 악이 되는 것이 있나니 하나님은 너회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라. (바카라장 216절)] 우마르 시대에 이르러 [[이슬람 제국]]은 [[그리스도교]],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리스도교의 5대 [[총대주교|총대교구]]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함으로써 이슬람 제국 안에 다수의 비[[무슬림]]과 소수의 무슬림이 공존하는 상황에 이르자 다수의 비무슬림들을 회유하고, 이들 가운데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비무슬림에게는 일종의 보호세인 [[지즈야]]'''를 납부하도록 하되, 이들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경우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에 이러한 전례를 들어 기존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고 있던 [[로마인]](=룸인), [[유대인]]과 갈라타에 거주하던 제노바인에 대해 [[지즈야]]를 내는 조건으로 기존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하도록 했다. 단 오스만 제국은 밀레트 제도하에서 자치를 누리는 비무슬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각 종교의 [[최고지도자]]들을 활용했다. 만약 각자의 밀레트 내에서 반란이나 오스만 제국을 위협하는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최우선적으로 각 종교의 최고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었는데, [[선거]]로 선출되는 [[정교회]] 및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는 선거에 개입해 [[정권]]에 맞는 인사를 내게 하거나, [[파디샤]]가 직접 임명하는 [[무슬림]] 최고지도자 (셰이훌 이슬람 - Şeyh-ûl İslam)의 경우 직접 해임시키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역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의 목록을 보면 같은 인물이 여러번 임기를 맡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심지어 중한 상황인 경우 종교지도자의 목을 문자 그대로 날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 정교회 밀레트의 최고지도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5세(Πατριάρχης Γρηγόριος Ε΄)의 경우 "황제께 충성하지 않고 반란질이나 하는 저 [[역적]]들은 무신론적인 세속주의자들일 뿐이니 우리 신자들 중 역적패당에 가담하는 자가 있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파문하겠다." 라고 선포까지 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전통상(...) 밀레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선종 후 그리고리오스 5세는 정교회에 대한 이슬람의 탄압의 상징이 되어 시성되어 현재는 [[아테네]]의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좌 성당인 미트로폴레오스 성당에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사실 한세기 뒤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민족 종교]]급 위상을 지녔던 [[로마 가톨릭교회]]도 막상 정치적 스탠스는 오히려 당국의 편에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을 비난했고, 비슷한 시기 심지어 [[폴란드]]도 평[[사제]]들이 개인 자격으로 민족주의 혁명에 뛰어든 것과는 별개로 공식적인 스탠스는 "각 분할 통치 점령국의 정부에 충성하라"는 것이었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이율배반적이거나 기회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혁명가들은 필요하면 재산도 가족도 다 버리고 산으로 숨어 들어 게릴라가 되면 되지만 교회 조직들은 신자들, 유서 깊은 성당 건물들, 유물들까지 싸들고 게릴라가 될 순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유는 명확하다. 위의 그리고리오스가 그리스 독립군에 대해 "저 역적 놈들에 가담하면 파문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도 오스만 당국의 보복을 받을 것이 뻔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그리스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총대주교의 처형은 오히려 오스만의 악수가 되었는데 총대주교가 처형당한 날이 하필이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로 기념하는 [[부활절]]이었고 그것도 부활절 기념 성찬예배를 보던 중 그 자리에서 끌려나와 바로 처형당했기 때문에 소식을 들은 그리스인들은 큰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격분하였고 [[독립군]]은 자신들의 칼에 그리고리오스의 이름을 새겨 튀르크인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또한 이 소식을 들은 유럽 [[열강]]들 역시(특히 [[러시아]]) 총대주교의 처형에 거세게 항의함과 동시에 [[유럽]] 내 친 그리스 여론을 부채질하면서 [[독립]]의 불길은 전보다 더 거세게 불타오르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